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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사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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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모토 사린 사건은 1994년 6월 27일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에서 옴진리교가 신경 가스인 사린을 살포하여 8명이 사망하고 274명 이상이 부상당한 테러 사건이다. 옴진리교는 부동산 분쟁으로 인한 재판에 불만을 품고 판사들을 공격하려 했으며, 사린 가스의 효능을 시험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사건 초기 경찰은 피해자 중 한 명인 고노 요시유키를 용의자로 지목했으나, 이후 옴진리교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언론은 초기 수사 과정에서 고노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보도를 쏟아내어 비판을 받았으며, 사건 이후 옴진리교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키며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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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사린 사건
사건 개요
명칭마쓰모토 사린 사건
발생 위치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기타후카시 주택가
표적해당 없음
날짜1994년 6월 27일 - 6월 28일
수단화학 테러, 종교 테러
사망자7명 - 8명
부상자중경상자 약 600명
피해자억울한 누명: 고노 요시유키
범인아사하라 쇼코가 이끄는 옴진리교도
범인 목록무라이 히데오
니이미 도모미쓰
하단모토 사토루
나카무라 노보루
나카가와 도모마사
도미타 다카시
쓰치야 마사미
엔도 세이이치
하야시 야스오
동기교단 마쓰모토 지부 철거 담당 판사 살해, 사린 실험
사건 상세
유형대량 살인, 화학 테러, 테러, 암살 시도
무기사린
좌표36.2430, 137.9716
시간22시 40분 (JST)
참고 사항
관련 사건옴진리교 사건

2. 사건 발생

1994년 6월 27일 오후 11시,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에서 최초 신고가 접수되었고, 다음 날인 6월 28일까지 6명이 중독으로 사망했다. 7월 3일 당국은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질량 분석방법을 사용해 독극물이 사린 가스임을 발표했다.[6]

사건 직후 경찰은 옴진리교 관련 익명 제보를 받았으나,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제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쓰모토 사건은 명확한 실험이다. 열린 공간에서 7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밀폐된 공간, 예를 들어 혼잡한 지하철에 살포된다면 큰 재앙이 될 것이다."

경찰은 피해자 가와노 요시유키에게 수사를 집중했고, 일부 언론은 그를 '독가스 맨'으로 불렀다. 그러나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옴진리교 신도들이 두 사건에 연루된 것이 밝혀지며 코노는 무죄가 되었다.

옴진리교는 에어로졸 형태로 사린을 마쓰모토 법원에 살포하려 했으나, 법원 폐정 후 도착하여 계획을 변경했다. 오후 10시 40분, 개조된 냉장 트럭에서 사린 가스를 방출, 판사들 거주지 근처로 퍼져 나갔다. 트럭에는 액체 사린 12리터를 에어로졸로 변환하는 장치와 팬이 있었다.[5]

다음 날, 현장 근처 연못에서 죽은 물고기, 개, 새, 애벌레 사체가 발견되었다. 풀과 나무는 시들었고, 잎은 변색되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연못 반경 150m 이내, 열린 창문이나 에어컨 켜진 방에 있었다.[6]

경찰은 메틸포스폰산디메틸 유통 경로를 조사, 옴진리교 관련 단체와 더미 회사를 발견하며 의혹을 키웠다.[38] 1995년 1월 1일, 요미우리 신문은 옴진리교 시설에서 사린 잔류물 검출을 보도, 옴진리교와 사린의 관계가 주목받았다. 옴진리교는 증거 인멸을 시도하고,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이용해 관심을 분산시키려 했으나, 결국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켰다.[40]

이 사건은 경찰의 부실 수사와 언론의 편파 보도로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린 오인 미수 및 보도 피해 사건이다.

2. 1. 피해 상황

1994년 6월 27일 심야부터 다음 날 6월 28일 이른 아침까지,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기타후카시의 주택가에서, 화학 무기로 사용되는 신경 가스사린이 살포되어 8명이 사망하고 약 600명이 부상당했다.[14] 부상자 수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마쓰모토시 지역 포괄 의료 협의회 조사에서는 약 600명, 형사 사건 재판에서는 144명,[15] 1997년 12월에는 4명으로 좁혀졌다.

사건 발생 14년 후인 2008년 8월 5일, 본 사건으로 인해 부상 치료 중이던 가와노 요시유키의 아내가 사망하면서,[16] 이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8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피해자들은 시야 흐림, 눈 통증, 두통, 메스꺼움, 설사, 축동(동공 축소), 손의 마비 등의 증상을 보였다. 일부 피해자들은 톡 쏘는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안개가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묘사했다.[3]

옴진리교가 당초 목표로 삼은 것은 나가노 지방 법원 마쓰모토 지부였으나,[19][20] 이와는 무관한 메이지 야스다 생명 보험 사택이나 일반 맨션에서도 피해자가 발생했다.

사건 직후 희생자 중에는 신슈 대학 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자 중에는 23세의 샐러리맨 고바야시 유타카와 29세의 의대생 야스모토 미이도 있었다.[7]

사건 발생 직후에는 희생자의 사인이 된 물질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 물질의 발생 원인이 사고인지 범죄인지, 혹은 자연 재해인지도 판별할 수 없었다. 7월 3일,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질량 분석(GC/MS)에 의해, 살포된 물질이 사린임이 밝혀졌다.[6]

3. 초기 수사 및 언론 보도

1994년 6월 27일 심야부터 다음 날 6월 28일 이른 아침까지,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기타후카시의 주택가에서, 화학 무기로 사용되는 신경 가스 사린 살포로 7명이 사망하고 약 600명이 부상했다.[14] 2008년 8월 5일, 사건으로 부상 치료 중이던 고노 요시유키의 아내가 사망[16]하면서, 이후 사망자를 8명으로 보는 사례가 있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희생자의 사인이 된 물질과 그 발생 원인(사고, 범죄, 자연재해)을 판별할 수 없어, 신문에는 "마쓰모토에서 수수께끼의 독가스 7명 사망"이라는 제목이 실렸다.

7월 3일,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질량 분석(GC/MS)에 의해, 살포된 물질이 사린임이 밝혀졌다.

사건 초기, 나가노현 경찰은 최초 신고자이자 사린 피해자인 고노 요시유키를 중요 참고인으로 지목하고, 6월 28일 가택 수색을 실시하여 약품류 등 20여 점을 압수했다. 이후에도 연일 계속되는 조사를 진행했다. 나가노현 경찰은 고노 씨의 집에서 압수한 농약으로는 사린 합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부 농약을 가족이 은닉했다고 주장하며 집요하게 수사를 계속하여 수사 방침 전환이 늦어졌다. 또한, 사건 발생 직후 수사원 중 한 명이 "재판소 관사를 노린 것 아니냐?"라는 추측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언론은 옴진리교가 진범으로 밝혀질 때까지 반 년 이상 동안 경찰 발표를 무비판적으로 보도하거나, 고노 씨가 구급대원에게 "제초제를 만들려고 조제에 실패하여 연기가 났다"라고 말했다는 경찰의 누설에 근거한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등 고노 씨를 진범처럼 보이게 하는 보도를 계속했다. 실제로는 사건 발생 당일인 1994년 6월 27일에 고노 씨가 약품을 조제한 사실은 없었다.

이러한 오보 논조는 특히 지역 유력 지방지인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마이니치 신문과는 무관)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사린이 농약이라는 오해는 현재까지도 남아 농약의 위험성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는 상황을 만들었다.[41]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고노 씨의 집에는 전국에서 일반인에 의한 많은 비방, 중상 편지가 보내졌다.

3. 1. 코노 요시유키의 피해

코노 요시유키는 언론의 과열 보도로 "독가스 맨"으로 불리며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8] 살해 협박, 욕설 메일, 법적 압박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8] 그의 아내는 사건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2008년 사망했다.[1][3]

사건 직후, 나가노현 경찰은 최초 신고자이자 사린 피해자인 코노를 중요 참고인으로 지목하고 가택 수색을 실시했다.[41] 경찰은 그의 집에서 발견된 농약으로 사린 합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 농약을 가족이 은닉했다고 주장하며 집요하게 수사했다.[41]

언론은 경찰 발표를 무비판적으로 보도하고, 코노가 구급대원에게 "제초제를 만들려다 조제에 실패해 연기가 났다"라는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등 그를 진범처럼 보이게 하는 보도를 계속했다.[41] 특히 지역 유력 지방지인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마이니치 신문과는 무관)은 이러한 논조를 주도했다.[41]

주간 신초는 "독가스 사건 발생원의 기괴한 가계도"라는 기사에서 코노의 가계도를 게재했고, 그는 "조상은 관계없다"라며 비판했다.[43] 주간 아사히는 사린을 "북한의 독가스"로 소개해 인권 단체로부터 항의받았다.[44]

반면, 텔레비전 신슈는 신중한 보도 태도를 유지하며 코노를 범인 취급하는 보도를 피하고,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보도했다.[45][51][52] 이는 도야마·나가노 연쇄 여성 유괴 살인 사건의 보도 피해를 교훈 삼은 것이었다.[45][51][52]

사건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코노의 집에는 전국에서 온 비방, 중상 편지가 쇄도했다.[41] 진실이 알려진 후, 주요 일본 신문들은 그에게 사과했다.[8] 마쓰모토 경찰서장은 경찰과 언론을 대표해 공개 사과했다.[1][3] 노나카 히로무 당시 국가공안위원장은 개인적으로 사과했다.[56] 나가노현 경찰 본부장은 "유감"을 표명했으나 직접 사죄는 없었다.[56] 그러나 2002년 코노가 나가노현 공안위원회 위원에 취임하면서, 나가노현 경찰 본부장이 과거 수사에 대해 사죄했다. 옴진리교는 알레프로 재편성된 후인 2000년에 코노에게 직접 사죄했다.

이후, 하노 요시유키는 나가노현 경찰을 감독하는 나가노현 공안위원회 위원으로 1기 임명되었다.

4. 진범 옴진리교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옴진리교 신도들이 마쓰모토 사건에도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다. 옴진리교는 마쓰모토 사건을 통해 사린 가스의 위력을 실험하고, 도쿄 지하철 테러를 위한 사전 준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4]

사건 직후 경찰은 옴진리교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으나, 관련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제보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마쓰모토 사건은 명확히 하나의 실험이다. 열린 공간에서의 실험결과 7명이 사망하였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만약 사린 가스가 밀폐된 공간, 이를테면 혼잡한 지하철과 같은 곳에서 살포된다면,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임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8]

사건 이후, 경찰은 아내를 에어로졸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뜨린 피해자인 고노 요시유키에게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고노의 집에서 다량의 농약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린이 농약으로 제조될 수 없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당시 일본 역사학자 츠네이시 케이이치는 신경작용제가 유기인 농약에서 합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9][10] 언론은 고노를 "독가스 남자"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고노는 이후 증오 메일, 살해 협박, 강도 높은 법적 압력을 받았다. 진실이 알려진 후, 모든 주요 일본 신문들은 고노에게 사과했다.

도쿄 공격 이후, 혐의는 옴진리교로 옮겨졌다. 마쓰모토 경찰서장은 경찰서와 언론을 대표하여 고노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여러 옴진리교 신자들이 두 사건 모두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포함한 13명의 옴진리교 신자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18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가노현 경찰은 사린 생성에 필요한 메틸포스폰산디메틸의 유통 경로를 조사하던 중, 유일하게 개인적으로 구매한 도쿄도세타가야구의 T.K라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의 주소지는 옴진리교 관련 단체가 있는 빌딩이었다. "벨 에포크"라는 회사도 이 약품을 대량 구매했는데, 이는 옴진리교의 위장 회사였다. "시모무라 화학", 하세가와 케미컬, "벡" 등 유사한 위장 회사도 발견되면서 옴진리교의 사린 제조 의혹은 더욱 커졌다.[38]

당시 건설 중이던 제7 사티안 사린 플랜트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주변에서 악취 소동이 일어났다. 나가노현 경찰은 토양을 채취했고, 1994년 11월 토양에서 사린의 최종 분해물인 메틸포스폰산이 검출되었다.[39] 1995년 1월 1일, 요미우리 신문은 1면에 악취 소동 장소에서 사린 잔류물이 검출되었다고 보도하여, 옴진리교와 사린의 관계가 크게 주목받게 되었다.

이에 옴진리교는 극약 처분 및 약품 구매용 위장 회사를 폐쇄하는 등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동시에 잔류물은 현지 비료 회사 사장이 옴진리교에 독가스 공격을 가한 증거라고 주장하며 그를 고소했다. 그러나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되었다. 아사하라 등은 "지진 때문에 강제 수사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한신·아와지 대지진에 필적하는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지하철 사린 사건을 실행했다.[40]

4. 1. 사건의 배경

옴진리교는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에 지부 도장과 식품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토지를 얻으려 했다.[23] 그러나 국토 이용 계획법에 따른 신고를 피하기 위해 임대 계약과 매매 계약으로 나누어 토지를 취득했다. 이 과정에서 옴진리교는 "주식회사 오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목적을 숨기고 계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민사 재판을 받게 되었다.[23] 결국 임대 계약은 취소되었고, 매매 계약 부분에 지부 도장만 건설하고 식품 공장은 포기해야 했다.[23]

1992년 마쓰모토 지부 도장 개소식에서 아사하라 쇼코는 재판소, 부동산 회사, 지주를 비판하는 설법을 했다.[23] 그는 체포 후 이 설법이 요가 이론에 대한 것이라고 변명했다.[24]

지역 주민들은 옴진리교의 사무실 및 공장 설립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5] 반대자들은 14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는데, 이는 당시 마쓰모토 인구의 70%에 해당했다.[5]

옴진리교는 토지 소유권 분쟁에서 불리한 판결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판사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사린 가스 테러를 계획했다.[4] 또한, 마쓰모토 사건을 통해 향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에 사용될 사린 가스의 성능을 시험하려 했다.[4]

사건 관련 주요 연표는 다음과 같다.

날짜사건
1991년 6월 18일토지 소유주에게 옴진리교임을 속여 토지 취득[67]
1991년 9월 12일지역 주민 측에 사업자가 옴진리교임이 밝혀짐[67]
1991년 10월 29일마쓰모토시가 건축 확인 허가[67]
1991년 10월반대 주민 대책 위원회 설치[67]
1991년 12월 9일교단 측, 건축 방해 금지 가처분 제소 (1992년 1월 17일 기각)[67]
1991년 12월 10일토지 소유주 측, 건설 저지 가처분 제소 (1992년 1월 17일 결정)[67]
1992년 2월 12일교단 측, 지부 도장 건축 확인 신청 (3월 23일 허가)[67]
1992년 5월 27일토지 소유주 측, 매매·임대 계약 무효 및 토지 인도 제소 (7월 22일 제1회 공판)[67]
1992년 12월 18일마쓰모토 지부 도장 개소[67]
1993년 8월쓰치야 마사미, 사린 합성 성공[67]
1994년 2월청색 사린 용액 제조[67]
1994년 5월 10일토지 인도 소송 결심[67]
1994년 6월 20일아사하라, 사린 공격 지시[67]
1994년 6월 27일마쓰모토 사린 사건 발생[67]
1994년 7월 19일담당 재판관 부상으로 판결 공판 연기[67]
1994년 11월경[59]「마쓰모토 사린 사건에 관한 일고찰」 유통[67]
1995년 4월 14일, 5월 2일, 5월 16일마쓰모토 지부 도장 강제 수사[67]
1995년 7월 26일마쓰모토 지부 도장 폐쇄[67]


4. 2. 사린 살포 계획 및 실행

옴진리교는 냉장 트럭을 개조하여 사린 가스를 살포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1994년 6월 27일, 옴진리교 신도들은 마쓰모토시 법원 관사 근처에서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4]

6월 20일경, 아사하라 쇼코는 제6 사티안 1층에 무라이 히데오, 신실 지코, 엔도 세이이치, 나카가와 도모마사를 모아, 마쓰모토의 재판소에 사린을 살포하여 그 효과를 실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28] 무라이 등은 2t 알루미늄 트럭을 개조한 사린 살포차를 만들었고, 나카가와는 방독면 제조, 예방약 준비 및 사린 살포차에 사린 주입을 담당했다. 신실은 이케다 다이사쿠 사린 습격 미수 사건에서 살포하는 것을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경찰이나 통행인 대응책을 묻고, 나카무라 노보루, 토미타 타카시, 하모토 사토시를 사용할 것을 지시받았다.[29]

6월 26일, 물을 사용하여 사린 살포기 시험을 실시하고, 하모토는 신실의 지시에 따라 마쓰모토시에 사전 답사를 갔다. 엔도와 나카가와는 마쓰모토 번호의 렌터카(왜건차)를 빌리러 갔다.[31]

6월 27일 이른 아침, 실행 멤버들은 도쿄 도내에서 열린 성청제 발족식에서 가미쿠이시키 촌으로 돌아왔다. 14시경, 신실은 하모토 등에게 "지금부터 마쓰모토에 가스 살포하러 갑니다!"라고 가벼운 말투로 작전을 전달했다. 하모토가 경비 중 전투가 벌어지면 죽여도 되는지 걱정하자 신실은 "괜찮지 않겠어요. 주로 싸우는 것은 경찰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싸우는 동안 우리는 도망칠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세요"라고 적당히 대답했다.[34]

저녁, 일행은 하모토가 운전하고 무라이가 동승한 사린 살포 차량과, 토미타가 운전하는 호위 부대의 왜건차에 나눠 타고 출발했다. 츠치야 마사미에 따르면, 이때 신실 등은 교단 내 은어로 사린을 지칭하는 마법사 샐리 노래를 차 안에서 합창했다고 한다.[35]

20시경, 시오지리시 내 드라이브 인에서 신실과 무라이가 상의한 결과,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기타후카시에 있는 재판관 관사에 대한 공격으로 작전을 변경하고, 전화로 아사하라의 합의를 얻었다. 이는 N 시스템을 피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사용하지 않은 점, 사린 12리터 주입에 시간이 걸린 점도 있어서, 도착 시간이 늦어져 나가노 지방 법원 마쓰모토 지부는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23] 22시경, 법원 숙소 근처에 도착하자, 주차장에서 번호판을 위장하면서 무라이가 살포 지점을 정하고, 살포를 실행했다.[23] 22시 50분경, 사린이 소진되어 출발했다.[33]

당초 옴진리교는 에어로졸을 마쓰모토 법원에 살포할 계획이었으나, 법원이 문을 닫은 후에 신자들이 시에 도착하면서 계획을 변경했다. 그들은 대신 시의 판사들이 거주하는 3층짜리 아파트 건물을 목표로 정했다. 오후 10시 40분, 옴진리교 신자들은 개조된 냉장 트럭을 사용하여 사린 가스를 방출했는데, 이는 판사들의 집 근처로 퍼져 나갔다. 트럭의 화물칸에는 액체 사린 12리터를 에어로졸로 변환하도록 특별히 설계된 가열 장치와 에어로졸을 주변으로 분산시키는 팬이 설치되어 있었다.[5]

아사하라는 마쓰모토 사린 사건 후 이노우에 요시히로에게 "나도 무차별(살인)은 힘들다. 하지만 아난다(=이노우에 요시히로), 바지라야나의 구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7]

5. 수사 결과 및 재판

사건 직후 경찰은 옴진리교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으나, 관련성이 드러나진 않았다. 제보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마쓰모토 사건은 명확히 하나의 실험이다. 열린 공간에서의 실험결과 7명이 사망하였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만약 사린 가스가 밀폐된 공간, 이를테면 혼잡한 지하철과 같은 곳에서 살포된다면,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임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8]

사건 이후 경찰은 중독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한 피해자의 남편인 고노 요시유키에 수사를 집중하였다. 코노의 집에서 대량의 농약이 발견되었다. 농약으로 사린 가스를 만들어낼 수는 없으나, 일부 언론에서는 코노를 '독가스 맨'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코노는 살인 협박, 욕설 메일과 강력한 법적인 압박을 받게 되었다. 결국 코노는 무죄로 드러났고, 일본의 주요 신문사들은 그에게 사죄하였다. 코노의 부인은 2008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1][3]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옴진리교 신도 몇몇이 두 사건에 모두 연루된 것이다. 1995년 (헤이세이 7년) 3월 20일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증인 사무장 체포 감금 치사 사건으로 옴진리교에 대한 강제 수사가 실시되었으며, 이후 교단 간부들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5월 17일 쓰치야 마사미가 마쓰모토 사린 사건 전에 사린을 제조하여 건넸다고 진술하는 등, 간부들은 마쓰모토 사린 사건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이 옴진리교의 소행임을 자백했다.[22]

여러 옴진리교 신자들이 두 사건 모두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포함한 13명의 옴진리교 신자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18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두 사건(마쓰모토, 도쿄)을 합쳐 21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입원 및 외래 진료를 받았다.

6. 언론의 오보와 억울한 피해

이 사건은 경찰의 부실 수사와 언론의 편파 보도로 인해 무고한 시민이 범인으로 몰린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건 초기, 경찰은 옴진리교와 사건의 관련성을 제보받았으나[8], 피해자 중 한 명인 고노 요시유키에게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고노의 집에서 농약이 발견되자, 일부 언론은 그를 '독가스 맨'으로 부르며 범인으로 단정 짓는 보도를 쏟아냈다.[8]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옴진리교 신도들이 두 사건에 모두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고노는 무죄로 드러났다. 일본 주요 신문사들은 고노에게 사죄했으며, 마쓰모토 경찰서장도 경찰과 언론을 대표하여 공개 사과했다.[1]

당시 언론은 고노 씨가 구급대원에게 "제초제를 만들려고 조제에 실패하여 연기가 났다"라고 말했다는 경찰의 누설에 근거한 허위 정보를 유포하고, 진위 확인 없이 타사의 보도를 추종하는 등 고노 씨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보도를 지속했다. 실제로는 사건 발생 당일인 1994년 6월 27일에 고노 씨가 약품을 조제한 사실은 없었다.

한편, 텔레비전 신슈는 고노 씨를 범인 취급하는 보도를 피하고, 그의 무죄 주장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등 중립적인 보도를 유지했다.[51][52]

6. 1. 언론 보도의 문제점

일부 언론은 고노 요시유키가 농약으로 사린을 제조했다는 허위 사실을 보도했다.[41] 지역 유력지인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마이니치 신문과는 무관)은 특히 고노 요시유키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보도를 주도했다.

언론 보도 예시는 다음과 같다.[41]

신문보도 내용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NHK 뉴스
마이니치 신문
주니치 신문
도쿄 신문"마쓰모토의 독가스 사망, 약품 조제 중에 발생, 회사원 자택에서 조제 오류" (1994년 6월 29일 석간 11면)
산케이 신문
니혼게이자이 신문"사린, 풀리지 않는 생성의 수수께끼, 시판 약으로 합성 용이" (1994년 7월 9일 조간 10면)
선데이 마이니치"마쓰모토 가스 중독 사망, 위험한 이웃의 정체" (1994년 7월 17일 156쪽)



주간 신초는 고노 요시유키의 가계도를 공개하며 사생활 침해 논란을 일으켰다.[43]

가와카미 가즈히사(메이지가쿠인 대학 법학부장)는 미디어 스크럼에 의한 범죄 보도가 만들어낸 억울한 사건의 예로 본 사건을 거론했다.[53][54]

6. 2. 언론의 사과와 반성

진실이 알려진 후, 일본 주요 신문들은 고노 요시유키를 용의자로 지목하지 않았던 신문들까지 포함하여 그에게 사과했다.[8] 옴진리교로 혐의가 옮겨진 후, 마쓰모토 경찰서장은 경찰서와 언론을 대표하여 고노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1]

언론사들은 지면에 정정 기사와 독자에 대한 사죄문을 잇따라 게재했다. 구메 히로시는 당시 "뉴스 스테이션"의 중계 대담에서 프로그램의 "얼굴"로서 사과했고, 고노에게는 보도 각사 직원들로부터 개별적인 사죄 편지가 다수 도착했다고 한다.

7. "마쓰모토 사린 사건에 관한 일고찰" 괴문서

사건 이후, 언론과 경찰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마쓰모토 사린 사건에 관한 일고찰"이라는 괴문서가 유포되었다.[22] 이 문서는 "사린 사건은 이다"라고 시작하며, 옴진리교가 사린 제조 및 입수 능력을 가지고 있고 고노 요시유키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또한, 사린 살포 방법에 대해 드라이아이스와 유기 용제를 이용한 시한폭탄 방식이 아니겠냐고 추측했다. 괴문서의 "추신"에서는 지하철이나 도쿄 돔 등에서 사린이 살포될 경우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이는 지하철 사린 사건으로 현실이 되었다.[8]

괴문서를 직접 입수한 곳은 주간문춘, TBS, TV 아사히 정도였다. 1989년선데이 마이니치의 특집 기사에서 옴진리교 비판을 처음 시작했던 마이니치 신문사는 괴문서를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60] 미야자키현 자산가 납치 사건을 담당했던 미야자키현 경찰은 이 괴문서를 통해 옴진리교의 사린 의혹을 알게 되었는데, 1994년 가을쯤이었다고 한다.[61]

7. 1. 괴문서 작성자 논란

사건 이후 언론을 중심으로 '마쓰모토 사린 사건에 관한 일고찰'이라는 괴문서가 배포되었다. 경찰과 언론 등 각지에 보내진 이 문서는 "사린 사건은 이다"라고 시작하며, 옴진리교가 사린 제조 및 입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고노 요시유키의 무죄를 주장했다. 또한, 사린 살포 방법에 대해 드라이아이스와 유기 용제를 이용한 시한폭탄 방식이 아니겠냐고 추측했다.[8]

괴문서 작성자는 "HtoH&T.K"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이후 괴문서에서 고노 요시유키가 불쌍해서 썼다고 밝혔다. "1994년 9월 모일"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와카미 야스미는 그 시기에 유통되었다는 증언은 없고, 1994년 12월 전후에 유통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타키모토 타로는 11월쯤에 유포되었다고 한다.[59]

괴문서의 "추신"에서는 "만약 지하철이나 도쿄 돔 등에서 사린이 살포될 경우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이는 지하철 사린 사건으로 현실이 되었다.

괴문서 작성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 단순한 매니아 설: 에가와 쇼코가 주장했다.[63] 언론 정보를 통해 쓸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괴문서 첫머리에 나오는 미야자키현 자산가 납치 사건은 에가와 본인이 주간문춘에 보도했고, TBS에서도 보도되었다.
  • 공안 설: 다치바나 다카시가 주장했다. 옴진리교 내 공안 스파이에 의한, 공안 상층부에 대한 경고 문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안 스파이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었다면 지하철 사린 사건도 막을 수 있었을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64][63]
  • 오오우치 토시히로 설: TBS, 주간 아사히가 주장했다. 주간 아사히는 교단의 무장화와 변모에 대한 고참 간부로서의 위기감, 러시아 지부에서의 우에사카 후미히로와의 대립으로 집필에 이르게 된 것 등을 이유로 들었다.[65]
  • 저널리스트·반 옴 변호사 설: 사키 류조가 주장했다.


"일고찰" 외에도 HtoH&T.K 명의의 괴문서가 19개 확인되었다. 이 괴문서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 글자 크기를 크게 하는 특징이 있다. 오자, 탈자, 우스꽝스러운 표현이나 저속한 표현도 많다.
  • 인용하는 신문은 기본적으로 요미우리 신문이며, 요미우리가 "일고찰"을 범행 예고문으로 오해하여 보도했을 때는 항의문을 보냈다.
  • 오타쿠적 지식이 풍부하다. 군사·화학 관계에서 게이힌 급행 전철의 쾌특 차량(아마 게이큐 2000형 전차일 것이다)의 창문에 대해서까지 언급한다.
  • 가네마루 신, 구메 히로시, 옴진리교를 포함한 종교 단체 전반, 초능력 등에 대해 비판적이다.

8. 사건의 교훈과 영향

마쓰모토 사린 사건은 옴진리교의 반사회성과 테러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경찰 수사의 문제점과 언론 보도의 책임 문제를 제기하며,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심각성을 보여주었다.

사건 직후, 경찰은 고노 요시유키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를 집중했다. 그의 집에서 대량의 농약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그를 '독가스 맨'이라고 부르며 혐의를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코노는 무죄로 밝혀졌고, 주요 언론사들은 그에게 사과해야 했다.[1] 코노의 아내는 사건 당시 사린 가스 중독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2008년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3]

이 사건은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옴진리교 신도들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진상이 드러났다. 옴진리교는 마쓰모토시의 토지 분쟁에서 불리한 판결을 막기 위해 판사들을 살해하려 했고, 사린 가스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일으켰다.[4]

마쓰모토 사린 사건을 계기로 일본 사회는 테러 대응 시스템을 강화하고 언론 보도 윤리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특히,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중한 수사와 보도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사건 이후 진행된 수사 과정과 옴진리교의 범행 동기, 그리고 옴진리교가 일으킨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이 사건들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일본은 테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관련 법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뉴스 Main Matsumoto sarin victim dies 14 years after attack https://archive.toda[...] The Yomiuri Shimbun 2008-08-06
[2] 간행물 Aum Shinrikyo: Once and Future Threat?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Research Planning, Inc.
[3] 뉴스 Survivor of Aum's '94 sarin attack dies while in coma https://web.archive.[...] The Asahi Shimbun 2008-08-06
[4] 문서 Aum Shinrikyo: Once and Future Threat?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Research Planning, Inc., Arlington, Virginia
[5] 뉴스 Matsumoto: Aum's sarin guinea pig http://www.japantime[...] 2017-02-24
[6] 웹사이트 The Sarin Gas Attack in Japan and the Related Forensic Investigation. https://www.opcw.org[...] Organis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 202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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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Guinea Pigs http://www.trutv.com[...] Patrick Bell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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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ゼンリン住宅地図 長野県 松本市(1)[松本] 202210 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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